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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장로로 살아온 42년을 뒤돌아보며-2

글쓴이 : 정영학 날짜 : 2018-04-18 (수) 06:47 조회 : 27
제가 바로 위의 누님에게 인도받고 처음 교회에 나간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누님이 아버지 몰래 교회에 다니던 때였는데, 왜냐하면 비록 우리 아버님이 형제 중 둘째였지만 우리집안이 종손이고 매년 전국에 흩어져있는 종중(宗中)어른들이 모여서 우리 선산(先山)에서 시제(時祭)를 드리고, 동네잔치를 할 만큼 전통이 철저하였을 뿐 아니라, 더구나 나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시제 뿐 아니라 오대 조(五代 祖) 조상들의 차례(茶禮)에도 꼭 참석해야 되는, 가풍(家風)을 거스를 수 없는 완고(頑固)한 가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은 뜻밖이었고, 부모님의 꾸중은 물론 교회에서도 놀랄 일이었지요.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모른 척하셨습니다. 그때는 교회에 나간들 그저 재미있는 얘기와 내가 몰랐던 깨어있는 세계를 만나는 신기한 시기였을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고(高), 대학(大學)때부터는 차츰 교회에서 멀어졌고, 가뭄의 콩 나듯 생각나면 다니곤 하게 되어져 갔습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안 믿으셔서 안 되었고, 장성해서는 내가 부모님을 꼭 예수 믿으시게 하여야겠다는 생각에 세례를 미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 자신의 믿음도 형편없었을 때이지만 핑계를 그렇게 해두고 차일피일 세례를 미뤄오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어려울 때는 그렇듯이, 나도 군에 입대하고 힘든 훈련소 생활을 하면서 다시 열정(?)적으로 교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매일 욕과 상소리로 기합만 받던 훈련과 질식할 것 같은 내무반에서 해방되어, 일요일이면 모처럼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기도하고 있으면 위로와 감동을 받아서, 그냥 눈물이 흐르는데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 라기보다는, 모진 시집살이하다 친정 엄마 품에 안겨 우는 딸의 서러움의 눈물 같은 것 이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편한 일반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엔 교회에 갈 형편이 안 되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또다시 가뭄의 콩 나듯 헸고, 세상이 더 재미있어졌을 때에는 더욱 교회는 멀어져서 가뭄의 콩 나듯이 아니라 아예 풀마저 나지 않을 것 같이 메말라져서 년 중(年中) 손가락으로 셀 만큼 겨우 교회근처를 기웃거리는 정도로 황폐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렇게 방황할 때에도 하나님은 주 욱 지켜보시고 계셨었나봅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당시에는 늘 외아들의 단골 메뉴였던, 죽을 고비도 몇 번씩 면(免)하였었고, 동네 사람들로부터도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모든 면에서 조금은 다른 아이들과 다른 무엇을 느끼며 지냈는데, 그때는 우리 집안의 배경이나 아버님의 위치 때문인가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신앙의 철이 들고나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려서 부터 눈여겨보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녀석 이렇게 뒀다간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결국 나를 그런 생활에서 빼내신 것 같습니다.
당시 나의 한국생활은 직장도 안정되었고, 고향의 모든 것들도 다 부족함이 없어 그냥 그렇게 안주하며 살아가면 불만은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 생활이 필경(畢竟)에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 데려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감히 비교될 수는 없지만, 저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에서 빼어내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인도 하신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 니다.